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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상온에서 가압한 원유를 다공성 PAN 분리막에 흘려보내 휘발유·나프타·등유 등 가벼운 성분만 걸러내는 공정 모식도(그림설명 및 그림제공 : KAIST 고동연 교수) |
[뉴스서울] 국내 연구진이 100여 년간 지속된 ‘끓여서 나누는’ 정유 공정의 상식을 뒤엎는, 상온에서 원유를 걸러내는 차세대 분리막 기술을 개발했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한국과학기술원(KAIST) 생명화학공학과 고동연 교수 연구팀이 원유를 끓이지 않고 값싼 고분자 막만으로 상온에서 정밀하게 걸러 내는 데 성공했다고 밝혔다.
과기정통부 지원 사업(개인기초연구(우수신진연구) 및 선도연구센터(ERC))으로 수행한 이번 연구 성과는 세계 최고 권위의 국제학술지인 '네이처(Nature)'에 6월 25일 자정(현지시간 6월 24일 16시, 런던 현지 시간)에 게재됐다.
최근 국제 정세 변화에 따른 유가 변동이 장바구니 물가 전반을 위협하는 핵심 요인으로 꼽히는 가운데, 그 바탕에는 지난 한 세기 동안 원유를 350℃ 이상으로 펄펄 끓여온 고에너지 소비형 정유 공정이 자리 잡고 있다.
실제로 전 세계 정유 공장이 원유를 끓였다가 식히는 ‘증류’ 방식에 의존하며 소비하는 에너지는 연간 1,100TWh(테라와트시)에 달하며, 국내 정유·석유화학 산업의 온실가스 배출량 역시 국가 전체 배출량 중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더욱이 최근 글로벌 석유화학 시장의 공급 과잉과 원가 경쟁력 심화까지 겹치면서, 기존의 고에너지 소비형 구조를 근본적 체질 개선 없이는 경쟁력 확보가 어려운 상황에 직면해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학계는 원유를 끓이지 않고 분리막으로 걸러내기 위한 연구에 주목해 왔다. 다만, 분자 단위의 초정밀 분리를 구현하려면 분리막 표면에 머리카락 두께보다 훨씬 얇은 ‘선택층’을 반드시 코팅해야 한다는 것이 지배적인 상식이었다. 그러나 선택층을 도입하면 소재 개발과 코팅 공정이 추가되어 제조 비용이 높아지고, 면적이 커질수록 코팅 결함이 생기기 쉬워 산업 규모로 확장하기 어려운 한계가 있었다.
연구팀은 이 상식을 완전히 뒤집고, 분리막에 아무런 코팅을 하지 않은 값싼 다공성 고분자(PAN) 막에 원유를 그대로 흘려보내는 파격적인 접근을 시도했다. 그 결과 원유 속의 무거운 기름 성분들이 분리막 내부의 미세한 구멍에 스스로 들러붙으며, 머리카락 굵기의 5만분의 1 크기인 2나노미터(nm) 이하의 정교한 미세 통로를 자발적으로 형성했다. 복합 혼합물인 원유가 분리막과 상호작용하며 스스로 맞춤형 ‘체’를 완성한 것이다.
이 체에 있는 통로를 통해 가벼운 나프타, 휘발유, 등유 성분만 빠르게 분리됐고 무거운 찌꺼기는 사실상 완전히 걸러졌다. 통상 분리막 표면에 기름 성분이 들러붙는 현상은 성능을 망치는 ‘오염(파울링)’으로 여겨져 왔지만, 연구팀은 이를 역으로 활용해 분리 통로를 만드는 도구로 전환시켰다. 이 방식은 기존에 보고된 최고 수준의 원유 분리막 대비 23배나 빠른 분리 속도를 기록했을 뿐만 아니라, 28일간 원유 분리를 지속해도 성능 저하가 없는 뛰어난 안정성을 입증했다.
이 기술의 가장 큰 산업적 매력은 막대한 설비 교체 비용 없이 기존 정유 공장의 배관 시스템에 필터 모듈을 추가하는 형태로 즉시 적용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원유를 이 분리막에 통과시켜 나프타, 휘발유 등을 먼저 분리하고 남은 성분만 기존 증류탑에서 증류할 경우, 처음부터 증류하는 경우보다 에너지는 31.6%, 이산화탄소 배출량은 37.6%를 감축할 수 있으며 운영비 또한 36% 절감된다.
이를 국내 정유·석유화학 전반에 확대 적용하면 연간 약 1,000만 톤의 온실가스를 감축할 수 있으며, 이는 승용차 400만 대가 1년 동안 내뿜는 탄소량과 대등한 수준이다. 또한 원유 분리에 머무르지 않고 폐플라스틱 열분해유 정제, 배터리 용매 회수, 의약품 정제 등 다양한 정밀 화학 공정으로 확장이 가능하여, 그동안 해외 기술에 의존하던 분리 공정을 독자적인 국산 ‘분자 정유’ 플랫폼으로 대체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KAIST 고동연 교수는 “이번 연구는 분리막이 혼합물과 만나 스스로 최적의 분리 통로를 빚어낸다는 새로운 과학적 원리를 규명해낸 성과”라며, “특히, 실제 원유를 공급해 준 HD현대오일뱅크와 긴밀하게 협력한 덕분에 실험실을 넘어 산업 현실에 맞닿은 수준까지 검증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공동 교신저자인 KAIST 이재우 교수는 “향후 국내 정유·석유화학 공정 곳곳에 끼워 넣을 수 있는 대면적 모듈화 기술과 장기 운전 기술을 완성해 100년간 증류가 지배해 온 정유 산업을 분리막 공정으로 전환하는 데 앞장서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또한, 제1저자인 KAIST 최지훈·서혁준 박사는 “이번에 발견한 자발적 기공 수축 현상을 자유롭게 제어해 정유 공정 전반을 막 분리 기술로 대체하는 것이 목표”라며, “원유뿐만 아니라 폐플라스틱 재활용, 바이오 연료 정제 등으로 기술을 확장하여 탄소중립 실현에 기여하겠다”고 뜻을 전했다.
과기정통부 김성수 연구개발정책실장은 “이번 성과는 정유 공정의 에너지 소비와 이산화탄소 배출을 동시에 낮추어 산업의 경쟁력을 높일 뜻깊은 성과”라며, “앞으로도 기초연구가 국민이 체감할 수 있는 성과로 이어지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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